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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뉴스

타이타닉 침몰로 목숨을 잃었던 세계 유명 인사 12명

by Tanyo 2021. 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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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즐거운 세상의 조이입니다. 다들 타이타닉호 기억하시죠? 잭과 로즈의 로맨틱한 사랑이야기로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눈물을 안겼던 영화 ‘타이타닉’에서 소개가 되기도 했었죠. 1911년 화이트스타사에서 제작했던 타모이타닉호에는 그 당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유명했던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고 합니다. 타이타닉은 누구나 한번 쯤 타보고 싶어할만한 배였으며 미국에서의 새로운 인생을 꿈꾸는 사람들로 가득했다고 하는데요. 눈부시게 화려했던 여객선 타이타닉은 E.J 스미스 선장과 승무원, 승객 모두를 합쳐서 총 2,224명이 탑승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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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비싼 값에 낙찰된 타이타닉 망원경의 열쇠

“신도 침몰시킬 수 없는 배”라고 선전하며 절대 가라앉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던 타이타닉호는 안타깝게도 첫 항해를 떠났던 1912년 4월 15일 밤 11시 40분 빙산에 부딪혀서 침몰했습니다. 

 

오랜 세월 숨겨져 왔었던 타이타닉 침몰의 진짜 이유는 바로 망원경의 열쇠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요. 망원경의 열쇠가 인계되지 않은채 항해를 시작한 타이타닉 호의 감시원은 육안으로 바다를 감시할 수 밖에 없었고 육안으로 빙하를 발견했을 때는 이미 배를 돌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빙산에 의해 큰 타격을 입었던 타이타닉호는 2시간 40분에 걸쳐서 침몰했으며 새벽 2시 20분에 배 전체가 바닷 속으로 가라앉았다고 합니다. 

 

 

65인승 구명보트가 총 20척이 있었지만 모든 탑승자를 태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어떤 구명보트에는 정원의 반도 안되는 13명이 탑승한 채로 탈출한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배가 침몰한 후 구조를 받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이 구명보트에 매달려 구조를 요청했으나 그들이 무게에 구명보트마저 가라앉을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던 승무원들은 그들의 요청을 뿌리쳤고 무려 15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영하의 차가운 물 속에서 살려 달라고 애원하며 죽어갔다고 합니다. 

 

 

바다에 빠진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성들이었고 그 중에는 갓난아기를 안고 있는 3등실의 여인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저체온증으로 30분 이내에 모두 사망했다고 하는데요. 이 비극적인 사건을 통해 총 1,519명의 사람들이 사망했으며 705명만이 생존했다고 합니다. 

 

타이타닉호의 침몰은 지금까지도 해양 역사상 가장 유명한 비극으로 손꼽히고 있는데요. 영국에서 뉴욕으로 향하는 첫 항해 도중 뉴펀들랜드 해안에서 침몰했던 타이타닉호는 호화로운 여행의 대표적인 예가 되었어요. 이 배에는 당시 유럽 최고의 패션 디자이너, 유럽과 미국에서 가장 부유했던 부자들, 높은 신분의 귀족 및 수많은 부유층의 사람들이 탑승했다고 합니다. 

 

 

척 아네시 연구원은 타이타닉 생존자들의 인구 통계를 통해 각 계층의 생존율을 분석했다고 하는데요. 연구결과 일등석의 여성 승객은 144명 중 97%가 구조된 반면 일등석의 남성 승객은 175명 중에서 32%만 구조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등석의 경우 전반적으로 조금 더 낮은 수치를 보였는데요. 여성의 전체 생존율은 74%, 남성의 생존율은 20%로 여성의 생존율이 우세한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가장 큰 희생을 치뤘던 사람들은 3등석에 탑승했던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은 타이타닉호에 탑승했던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타이타닉호의 침몰로 목숨을 잃었던 가장 유명한 12명의 사람들에 대해서 알아봤습니다. 

 


 

첫 번째, 백만장자 ‘존 제이콥 애스터(John Jacob Astor, millionaire)’


존 제이콥 애스터는 명망높은 애스터 가문의 사람이었으며 스페인-미국 전쟁의 참전용사였어요. 또한 미국의 사업가이자 부동산 개발업자, 투자가, 발명가, 공상 과학소설을 쓰는 작가 였다고 하는데요. 애스터(47세)는 자신의 어린 아내 매들린(17세)이 임신했을 때 함께 유럽여행을 갔었는데 출산일이 다가오자 아이가 미국에서 태어나도록 하기 위해 뉴욕으로 가는 타이타닉호를 예약했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를 목격한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애스터는 부서진 나무조각에 매달려 있었다고 하는데요. 끝내 보트에 탑승하지 못했던 그는 저체온증으로  목숨을 잃었으며 그의 아내 매들린과 뱃속의 아이는 무사히 살아남았다고 합니다. 애스터는 당시 약 87만 7천달러(오늘날의 22억 1천만달러)의 재산을 가진 사람이었으며 타이타닉호 탑승자 중 가장 부유했던 사람이라고 합니다. 

 

 

 

두 번째, 저널리스트 ‘W.T. 스테드(W. T. Stead, investigative journalist)’


스테드는 당시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언론인으로 매우 영향력이 있는 신문 기자였다고 합니다. 그는 아동 매춘에 관한 폭발적이고 논란이 많은 사건 시리즈를 출간했으며 유사 사건의 저널리즘(신문, 방송, 잡지를 위해 기사거리를 모으고 기사를 쓰는 일)을 창안하는데 큰 도움을 준 공로를 인정받고 있는 사람이라고 하네요. 또한 그는 초자연적인 사건에 관심이 매우 많았던 심령술사였으며 가상의 이야기를 쓰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고 합니다. 

 

 

타이타닉 침몰사건과 매우 유사한 가상의 소설을 썼던 것이 그의 죽음 이후 알려져 매우 화제가 되었다고 하는데요. 대서양에 가라앉은 한 증기 우편선에 대한 이야기인데 구명보트 부족으로 인해 700명의 승객중 200명만 살아남았다는 내용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영적으로 깨어 있었던 스테드가 자신의 죽음과 타이타닉호의 침몰을 미리 예견했던 것이 아니냐는 주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테드를 목격한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스테드는 타이타닉호가 침몰하던 순간 자신의 방에서 책을 읽으며 마지막 순간을 보냈다고 합니다. 

 

 

세 번째, 타이타닉호의 건축가 ‘토마스 앤드류스(Thomas Andrews, architect of the Titanic)’ 


토마스는 평범한 타이타닉의 희생자가 아니었어요. 오랜 시간동안 타이타닉에 공을 들였던 건축가였는데요. 그는 자신의 직원 할랜드, 월프와 함께 타이타닉을 설계했으며 첫 항해에 대한 감독과 개선점을 체크하기 위해서 타이타닉에 올랐다가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토마스는 타이타닉호가 빙산에 부딪힌 순간 이 배가 침몰할 것을 확신했다고 하는데요. 토마스는 즉시 여성들과 어린아이들을 구명보트에 태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의 마지막 모습을 목격한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갑판 위에 있었으며 물 속에 빠진 사람들에게 물에 뜰만한 갖가지 물건을 던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39세의 젊은 조선사, 토마스의 관심사는 오로지 승객의 안전이었다고 하네요. 

 

 

왼 - 크리켓 선수 시절, 오 - 사망 당시 모습

네 번째, 철도 회사 임직원 ‘존 테이어(John Thayer, railroad executive)’


존 테이어는 젊은 시절 크리켓 선수로 이름을 알렸으며 미국의 사업가로 펜실베니아 철도회사에서 30년간 임원 경력을 쌓았다고 합니다. 타이타닉호가 침몰하던 당시 그는 회사의 부회장이었으며 자신의 아내, 아들과 함께 타이타닉을 타고 여행을 하던 중이었다고 합니다.

 

배가 빙산에 부딪힌 직후 테이어는 자신의 아내와 하녀가 구명보트에 확실하게 탈 수 있도록 노력했으며 자신은 갑판 위에서 마지막 순간을 맞이했다고 합니다. 그의 마지막 순간을 목격한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그의 모습은 굉장히 침착했으며 단호하고 창백한 얼굴이었다고 합니다. 테이어의 아들은 배가 침몰하기 직전 물에 뛰어들어 구명보트에 탑승해 살아남았다고 합니다. 

 

 

다섯 번째, 메이시스(Macy’s)의 공동 소유자 ‘이시도르 스트라우스와  그의 아내 아이다(Isidor Straus, co-owner of Macy’s — and his wife Ida)


이 부부는 남북전쟁 이후 무일푼인 이시도르 스트라우스가 뉴욕으로 이사를 하면서 처음 만났다고 합니다. 스트라우스는 자수성가해서 후에 자신의 형과 함께 메이시스(Macy’s)를 공동 인수했으며 능력있는 사업가이자 미국의 하원의원이 되었다고 하는데요. 

 

 

타이타닉호가 침몰할 당시 스트라우스는 구명보트의 빈자리에 탈 것을 제안받았으나 모든 여자와 아이들이 배에서 내릴 때까지 자신은 구명보트에 타지 않을 것이라며 거절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의 아내 아이다 또한 구명보트를 타지 않고 자신의 남편 스트라우스 곁에 남았다고 합니다. 스트라우스가 구명보트에 탈 것을 재촉하자 아이다는 “우리는 오랜 세월 함께 살아왔어요. 당신이 가는 곳에 내가 갑니다.”라고 말하며 마지막을 함께 했다고 하네요. 

 

이후 아이다는 자신의 하녀에게 구명보트에 탈 것을 명령했고 더이상 자신에게 필요하지 않다며 자신의 밍크 코트를 줬다고 합니다. 이 부부는 타이타닉호의 갑판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되었으며 스트라우스의 시신은 발견되었으나 아이다는 끝내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일곱 번째, 광산 재벌 ‘벤자민 구겐하임(Benjamin Guggenheim, mining magnate)’


광산업으로 부를 얻은 벤자민 구겐하임은 자신의 현지처(애인)인 프랑스의 가수 레온틴 어바트(Léontine Aubart)와 타이타닉 호을 타고 여행을 하던 중이었다고 합니다. 배가 가라앉기 시작하자 그는 레온틴과 하녀를 구명보트에 탑승시킨 다음 자신의 객실로 돌아가 턱시도로  갈아입고 단추 구멍에 장미를 꽂고 마지막까지 시가와 브랜디를 즐기며 최후를 맞이했다고 합니다. 또한 그는 “나는 내게 가장 어울리는 예복을 입고 신사답게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여덟 번째, 철강 재벌 ‘조지 데닉 윅(George Dennick Wick, steel magnate)’


미국 오하이오주 영스타운에서 태어난 조지는 영스타운 시트 앤 튜브 회사(Sheet and Tube Company)의 창립 회장이었습니다. 건강을 위해 1912년 유럽 여행을 시작했으며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그의 아내 메리 히치콕 윅(Mary Hitchcock Wick), 딸 메리 나탈리 윅(Mary Natalie Wick), 사촌 캐롤라인 보넬(Caroline Bonnell), 촌의 숙모 엘리자베스 보넬(Elizabeth Bonnell)과 함께 타이타닉호에 탑승했다고 하는데요. 타이타닉이 가라앉을 때 그는 구명보트에 자신의 아내와 딸, 사촌과 숙모를 무사히 태운 뒤 배 갑판 위에서 그들에게 손을 흔들며 마지막 인사를 했다고 합니다. 

 

 

아홉 번째, 철도 회사 임직원 ‘찰스 멜빌 헤이즈(Charles Melville Hays, railroad executive)’


헤이즈는 17세의 어린 나이에 사무원으로 철도 사업에 종사하기 시작했으며 그 능력을 인정 받아 관리직으로 승진, 관리직에서 다시 총 책임자로, 1889년에는 그 회사의 부회장으로 승진을 하며 자신의 능력을 나타냈던 인재였습니다. 마침내 그는 캐나다와 미국에서 운행되는 철도회사(그랜드 트렁크)의 회장이 되어 미국 철도업계의 거물이 되었지만 타이타닉 호의 침몰과 함께 목숨을 잃었습니다. 

 

헤이즈는 그의 아내 클라라, 딸 오리오, 사위 손튼 데이비슨 등 많은 하인들과 타이타닉에 탑승했으며 마지막 순간 사위와 함께 자신의 아내와 딸 등 수많은 여성들과 아이들을 구명보트에 탑승시킨 뒤 죽음을 맞이했다고 합니다. 헤이즈의 시신은 수습되었고 몬트리올의 마운트 로얄 묘지에 묻혔다고 하네요. 

 

 

 

열 번째, 브로드웨이의 프로듀서 ‘헨리 B. 해리스(Henry B. Harris, Broadway producer)’


해리스는 타이타닉에서 목숨을 잃을 당시 뉴욕 브로드웨이 극장의 주인이었고 유명한 프로듀서였다고 해요. 그는 1897년부터 연극을 만들었고 배우 관리를 시작했다고 하는데요. 자신의 아내이자 브로드웨이의 배우였던 르네 해리스와 함께 타이타닉에 탑승했으나 절망적인 재난을 피하지 못했던 브로드웨이의 큰 별입니다. 

 

 

타이타닉호가 침몰하기 시작했을 때 르네는 타이타닉호의 홀에 있었던 높은 계단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했다고 하는데요. 팔꿈치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했던 르네를 살리기 위해서 해리스는 그녀를 안아 올려 승무원의 품에 안겨줬다고 합니다. 구명보트를 타고 떠나는 아내의 품에 객실에서부터 가져왔던 담요를 던지며 마지막 인사를 했다고 합니다. 생존한 르네 해리스는 남편의 뒤를 이어 미국 최초의 여성 연극 제작자가 되었으며 능력을 인정받아 명성을 얻었다고 하네요. 

 

 

열 한 번째, 미스터리 작가 ‘자크 푸틀렐(Jacques Futrelle, mystery writer)’


조지아 출신인 그는 뉴욕 헤럴드와 보스턴 포스트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했으며 타이타닉호에서 목숨을 잃기 전 추리소설 작가로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가장 유명한 그의 시리즈는 “세포의 문제 13(The Problem of Cell 13)”입니다. 

 

푸틀렐과 그의 아내는 배가 침몰하기전 헨리 해리스(르네 해리스) 부부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고 하는데요. 그는 일등석의 일류 승객이었지만, 구명보트에 탑승하는 것을 거부하고 오직 자신의 아내만 안전하게 태울 것을 요구했다고 합니다. 그의 아내 릴리가 기억하는 푸틀렐의 마지막은 배 갑판 위에서  ‘존 제이콥 애스터(John Jacob Astor)와 함께 담배를 피우며 이야기를 나누던 모습이라고 하네요. 그렇게 푸틀렐은 애스터와 함께 마지막 담배를 태우면서 바닷 속으로 가라앉았습니다.

 

 

열 두 번째, 미국 대통령 보좌관 ‘아치볼드 버트(Archibald Butt, presidential aide)’


버트는 타이타닉호의 침몰로 목숨을 잃기 전에 다양한 경력을 쌓았던 아주 유능하고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알링턴 국립묘지 웹사이트(Arlington National Cemetery’s website)에 따르면 버트는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으나 이후 스페인과 미국 전쟁 중 미군에 입대했다고 합니다. 그는 쿠바와 필리핀에서도 복무했으며 이후 1908년 미국의 26대 대통령인 루즈벨트의 군사 보좌관이 되었습니다. 또한 27대 대통령인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의 군사 보좌관 자리 또한 버트가 담당했다고 하는데요.  

 

1912년 루즈벨트 전 대통령과 현 대통령 태프트 사이의 심각한 다툼이 있었는데 중립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던 중 그의 건강이 악화되었고 휴식을 위해서 유럽에서 6주간의 휴가를 가졌다고 합니다. 휴가를 마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타이타닉 호에 탑승 했지만, 그는 끝내 목숨을 미국으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타이타닉 호가 침몰하기 시작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패닉에 빠졌다고 하는데요. 남성 승객들이 ‘여성과 아이들 우선’이라는 규정을 무시하고 구명보트에 서로 타려고 하자 자신의 총을 꺼내 들어 여성들과 아이들이 구명보트에 탑승할 수 있도록 도왔다고 합니다. 

 

 

마지막 목격자의 증언에 따르면 버트는 배 갑판 위에 서서 존 제이콥 애스터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고 하네요. 버트의 시신은 끝내 찾지 못했으며 버트의 장례식에서 루즈벨트와 태프트는 추도사를 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세계를 움직이는 힘과 부를 가졌던 유명한 사람들이었지만 타이타닉호의 침몰과 함께 순식간에 목숨을 잃었던 아주 끔찍한 사건이었습니다. 모두 소개하지는 못했지만 대부분의 남성들은 여성과 아이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포기했었습니다.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아야할 해양사고입니다. 배를 타고 여행하는 모든 분들이 안전하기를 바라며 이상 즐거운 세상의 조이였습니다. 좋아요와 구독 많이 눌러주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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